내 아이와 화해하기
속마음과는 다르게 또 큰 소리를 치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학원을 마치고 와야 할 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돌아왔고,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희정이네 들려서 오느라고.......” 하는데 제가 버럭 해 버렸습니다.
“네가 왜 희정이를 데려다 줘? 네가 걔 종이야?”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종이어서 데려다 줘? 얘기를 하다 보니, 걔네 집 앞에까지 갔고, 거기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늦은 거지!”
“그러니까, 네가 왜 희정이네 집 쪽으로 가냐고? 희정이가 우리 집 쪽으로 와도 되잖아?“
말해놓고 나니 더 어의가 없는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아이를 잡았습니다. 실은 평소에도 아이가 친구 사귀는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딸은 누구 하나가 좋으면 뭐든지 그 친구와 함께 하려들고,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요새는 희정이에게 꽂혀서 저렇게 붙어 다니니,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해야지! 엄마가 기다리잖아, 엄마가 걱정하잖아!“로 마무리를 하려했지만, 이미 던진 거친 말들로 아이 마음은 닫쳐버렸고, 결국 딸은 “엄마는 괜히 그래! 내가 뭘 어쨌다고?”라며 제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성을 내고 들어가는 아이 뒤통수에 대고 다시 한 소리를 할까 하다가 말을 삼켰습니다. 나도 내가 엉뚱한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30분 늦어서도 아니고, 밥시간이 늦어서도 아니라는 것. 본심은 딸의 친구 사귀는 행태인데, 그 또한 그 자체가 큰 문제여서라기 보다는 내 어릴 때 모습이 겹쳐져서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요. 어릴 때 내 마음의 가장 큰 무거움은 늘 친구 사귀기였습니다. 새 학년이 되면 난감했고, 학교 가기가 싫었고, 간신히 다가와주는 한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만 바라보며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행여나 그 아이가 마음이 바뀔까봐 조마조마했고, 그러니 잘해주고, 양보하고, 맞춰주는 것은 늘 내 몫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어머니가 마지막 선은 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끝까지 본인의 옳다는 논리를 펴면서 아이를 몰아붙이고, 아이 입에서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겠다고 우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작게, 크게 부딪힐 일이 늘어납니다. 그건 당연하기도 하고, 심지어 바람직하기조차 하지만, 막상 겪는 부모 입장에서는 그렇게 개운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좀 틀렸어도, 실수를 했어도 알게 모르게 넘어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호시절은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모의 말과 행동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본인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때로는 항거하고 반항하는 태도로.
그렇게 아이와 불화를 겪었을 때, 아이 쪽에서 먼저, ‘엄마,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를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 내 아이가 한 서른은 되면 모를까....... 아직은 턱도 없는 기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불화 다음에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안 섞고, 냉랭하게 대하는 부모, 또는 지난번 그 사건을 다시 꺼내 야단을 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개운해지고, 아이와의 관계도 회복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와 어긋났을 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보내야하는 쪽은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아이가 분명히 잘못했을 때도 그러하고, 실은 부모가 너무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어린 그들은 우리의 눈길을, 손길을 분명 원하고 있습니다. 화해하고 다시 친밀한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부모나 아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회복의 과정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먼저 한 발짝 떨어집니다.
의견이 엇갈려 소리가 커지고 화가 치미는데, 거기서 계속 머물러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을 때 비로소 상호간에 무엇이 오고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론을 내자고, 끝장을 볼 때까지 승강이를 벌일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다시 생각해보자’가 나을 것입니다. 이 기간은 몇 시간도 좋고 며칠도 좋습니다.
둘째. 회복과정에는 두 가지 초점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하나는 ‘아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아이 편에 대한 궁리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나에 대한 생각입니다. 아이와 크게 부딪쳤고, 그 연결이 선명하지 않다면, 많은 경우, 부모 쪽의 정서적 주제가 섞여있습니다. 부모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감정의 묵은 찌꺼기가 아이가 가져온 사건으로 자극되어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내가 부모니까, 내 문제보다는 아이 문제 쪽에 초점을 맞추려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중요해서’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실은 내 문제를 보기 힘들어서일 것입니다.
셋째. 두 번째 과정을 잘 해 냈다면, 다시 아이와 마주 앉아도 좋습니다.
이 때 우리의 희망은 회복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다시 야단치고, 항복을 받아내고, 재발방지를 약속받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부모와 불화를 겪으면서 아이는 무엇을 경험했는지, 아이의 느낌과 생각을 묻고 들어보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나는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 무엇을 실수했는지 후회하는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변명하지 말고 심문하지 말고 가르치려는 마음도 참아야합니다. 부모를 이해하라고하기 전에 아이의 입장과 경험을 충분히 듣고, 납득하기 어려운 점을 묻습니다. 잘 듣기 위한 질문과 비난하기 위한 질문은 다릅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태를 제대로 설명하면서 나름대로의 자각과 각성을 얻습니다.
부모 노릇을 길게 할수록 자식 앞에 솔직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알게 됩니다. 부모 노릇 중, 지적하고 야단치고 설교하는 것이 가장 쉽다는 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부모 자식 관계가 언제나 화기애애할 수 없습니다. 성장해가는 자식과 갈등은 당연한 수순이고,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는가에 관계의 질이 정해집니다. 우리는 자식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가 서로로 인해 행복해지는 삶을 희망합니다. 자녀와의 관계 형성에 사춘기는 중요한 국면이 될 것입니다. 내 문제를 바라보는 용기, 실수를 인정하는 솔직함, 부모라는 기득권을 기꺼이 내려놓는 철학적 태도가 우리의 무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기연(호연심리상담클리닉)